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경 전투 (문단 편집) ==== 외전: 에피날을 향해서! ====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fdf516ba1b18c0557caca8acb95f13a6.jpg|width=250]][br]독일 제7군의 사령관[br]'''[[요시아스 폰 헤링겐]]'''[* 프랑스 제2군을 손쉽게 격파한 루프레히트와 달리 너무 늦게 참전하여 프랑스 제1군을 격퇴하는데 실패했다.] || 그러나 모르주 전투는 루프레히트가 의도했던 위대한 기동공세로 발전하지 못했다. 폰 헤링겐의 제7군은 제6군에 비해 6시간이나 늦게 참전해 버려서 기습의 효과를 완전히 상실한 데다가 제7군의 란트베어[* 한국으로 치자면 '''향토예비군'''과 비슷한 군사력이다.] 부대가 보주산맥에서 프랑스 알프스 산악병의 활약에 완전히 막혀버렸다.[* 프랑스와 달리 독일군은 특별히 훈련시킨 산악병이나 산악포가 전무했다.] 엎친 격에 덮친 격이라고, 산맥에 안개까지 드리워 혼란 속에 아군끼리 죽이기도 하는 난전이 난무했다. 프랑스군 입장에선 다행히도 제6군과 제7군은 치열한 교전에 지친 나머지 다시 추격하는데까지 3일이 걸렸다. 조프르는 이 귀중한 시간을 큰 피해를 입은 프랑스군을 재정비하는데 활용했다. 카스텔노의 붕괴한 제2군을 재건해 낭시 방어선을 준비하고, 새로운 로렌군(Army of Lorraine)을 새로 형성해 미셸 모누리(Michel Maunoury)를 지휘관으로 임명해 수세적인 임무를 부여했다. 26일, 포의 알자스군이 모르주 전투에 별 도움이 안되었다는 점에 깨달은 조프르는 알자스군을 해체하고 상당수의 병력을 파리에 위치한 제7군단으로 이송했다.[* 이로부터 사흘 후 독일군은 뮐루즈를 다시 재탈환했다.] 사실 이 패배는 불행 중 다행으로 만약에 더욱 깊숙히 진격했다가 퇴로가 끊겼다면 후퇴는 커녕 아예 괴멸당해 '''군단 단위로 포로가 속출하고 훗날 지휘관으로 활약하는 포슈 등이 적어도 4년간 포로로 썩었을 가능성마저 있다.''' 역사가 G.J. Meyer는 이런 가능성을 들어서 루프레히트의 성급한 반격은 "중대한 실수"(a serious mistake)라 평가한다.[* pg. 119] 이런 아쉬운 점을 무시한 독일 총사령부는 상술했듯이 승리에 매우 만족했다. 이미 루프레히트에게 [[철십자 훈장]] 1급과 2급을 수여한 폰 몰트케(小)는 아예 전략을 수정하기를 고민했다. 애초에 반격을 결정한 루프레히트는 제2군과 제1군을 격퇴한 후 좋은 방어선을 취한 후 잉여병력을 죄다 우익으로 보낼 생각이었으나 루프레히트의 갑작스러운 성공에 폰 몰트케(小)는 갑자기 프랑스 동부의 요새 에피날(Epinal)과 툴루즈(Toules)가 구미 땅기기 시작했다. 이에 프랑스 제2군이 완전히 전력을 소진했다고 판단한 폰 몰트케(小)는 우익에 집중하기 보다는 동부에도 에피날 요새를 향한 또 하나의 공세를 펼쳐서 '''단독 우익기동이 아닌 양익기동을 구상했다.''' 루프레히트와 크라프트는 낭시가 아닌 에피날을 향한 새로운 전략적 목표에 의아해 했다. 루프레히트와 크라피트의 항의에 폰 몰트케(小)는 프랑스군이 지속적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서 만약에 "병사들과 전마의 마지막 숨"(the last breath of man and horse)마저 소진한다면 충분히 툴루즈와 에피날을 돌파할 수 있으며 아예 뇌프샤토(Neufchâteau)마저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 설명했다. 폰 몰트케(小)의 구상에 의하면 조프르의 프랑스군을 아르덴에서 붙잡고 있는 동안 제1군, 제2군, 제3군이 '''프랑스 좌익을 강타하고''' 제6군, 제7군이 '''프랑스 우익을 강타한다면''' 그대로 찌그러질 것이라 생각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erman_objectif_24_august_1914.jpg|width=500]][br]헬무트 폰 몰트케(小)의 에피날 공세 || 그러나 몰트케(小)의 위대하다 못해 허망한 계획은 24시간만에 박살났다. 루프레히트의 제6군이 샤름(Charmes)를 향해 진군하고 헤링겐의 제7군이 프랑스군을 우회하려는 동안 이미 재조직한 제1군과 제2군은 8월 25일 8AM에 뫼르트강 북부로 반격을 펼쳤다. 트뤼 드샤름(trouée de Charmes) 전투(혹은 Battle of Mortagne-모르타뉴 전투)는 사이사이에 3개의 강(샤름, 뫼르트, 모젤-Moselle)이 배치된 언덕에서 벌어졌다. 당연하지만 이는 방어자에게 매우 유리한 지형으로 특히 프랑스군은 평시에 인근에서 수번이나 훈련해 왔다. 카스텔노는 제16군단, 제15군단, 제20군단을 예봉으로 삼아 독일 제6군의 우익을 강타하고 뒤바이는 제1군 좌익의 두 군단으로 바이에른 제1군단과 프로이센 제21군단을 공격했다. 프랑스군의 갑작스러운 반격에 순식간에 3면에서 공격당한 제6군은 포위당할 위기에 처했다. 제6군의 우익을 맡은 루트비히 폰 겝자텔(Ludwig von Gebsattel)의 바이에른 제3군단은 제5보병사단, 제4보충사단, 제8보충사단을 [[몸빵]]삼아 우회하려는 프랑스군을 막고자 했으나, 되려 큰 피해만 입고 격퇴당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6._Armee_August_1914.jpg|width=500]][br]트뤼 드샤름(trouée de Charmes) 전투의 지도 || 제6군은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 바이에른 제2군단장 마티니의 보고에 의하면 휘하 중대는 본래 250명에서 '''30명'''으로 줄어들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은데다가 제2군의 몇몇 보병부대는 '''75%'''의 전력을 상실했다고 한다. * 막시밀리언 폰 몬트겔라스(Maxilian von Montgellas)의 바이에른 제4보병사단은 로레인에서의 교전으로 거의 '''9,000명'''의 병력을 상실해 불과 '''3,000명'''밖에 남지 않았다. * 바이에른 제1보병사단은 이틀만에 '''1,000명'''의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제6군 입장에선 다행이도 26일에 심한 호우가 쏟아진데다가 프랑스 [[포병]]부대들이 1-3PM동안 점심을 위해 휴식을 취한 덕에 그나마의 병력을 보존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ench_soldiers_ditch_1914.jpg|width=400]][br]교전중인 프랑스 병사들 || 8월 28일, 트뤼 드샤름 전투는 양군에 큰 피해를 입은 채 무승부로 종결했다.[* 말이 무승부지 실상 공격해온 독일군을 프랑스군이 막아세웠기에 프랑스군의 승리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본문에서 무승부라 표기한 것은 참고서적 에서 무승부라 표기했기에 따른 것이다.] 이후 로렌 전선은 거의 일주일간 큰 교전없이 대치를 지속했는데, 조프르는 이 시간을 활용해 로렌 전선에서 병력을 빼서 [[파리(프랑스)|파리]]로 이송했다. 제6군의 실패에 격분한 폰 몰트케(小)는 제6군의 [[바이에른]]인의 낮은 전의를 비난하고 전략을 수정해 무모하게 에피날을 노리기보다는 낭시 방어선을 강타하기로 결정했다. 독일 제6군과 프랑스 제2군간의 낭시공방전은 1차 [[마른 전투]]가 터졌을 때쯤에 재개한다. [clearfix]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